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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영원한 올챙이 - '고요한소리' 보리수잎 하나
이름 무명 날짜 2011-06-23 [14:51] 조회 9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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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수01.hwp /받음:206   goyohansori/60

 
 
 


  고요한소리 http://cafe.daum.net/goyohansori
消息



보리수잎·하나



영원한 올챙이

BUDDHISM IN DALY LIFE


엠오시 월슈 지음
M.O'C.Walshe
강대자행 옮김



(BODHI LEAVES NO. B86)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SRI LANKA



차례

첫 발간에 즈음하여 5
영원한 올챙이 8
일상생활과 팔정도 17
자기를 구출하자 28
좌선하지 않고 선하는 법 37
주해 48




  첫 발간에 즈음하여

  불교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그만큼 불교가 어렵다는 소리도 높아가고 있다. 정말 불교가 어려울까. 대충 짐작가는 면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올바르게만 접근하면 불교가 어려울까닭은 하나도 없다. 어려운 불교는 없다. 어렵게 느껴지는 불교가 있을 뿐이다.
  불교를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인가. 길은 많다. 가장 진지하게, 가장 큰 보람을 찾으려는 사람들을 위해 여기 실 수행의 길을, 그것도 가장 오래된 길을 소개하려고 한다. 이 길은 부처님이 제시하신 길이다. '고요한 소리'는 부처님의 고요하신 원음을 찾아 귀기울이려는 뜻들의 모임이다. 그러나 이 영원한 원음은 역사의 소음 속에 가려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다소 노력을 해야만 한다. 소음이 적은 곳은 없다. 자신의 귀를 더 밝힐 수는 없는가.

  스리랑카는 절해 고도다. 험준한 티벳트와 더불어 이 섬은 불교의 안전한 장고(藏庫)다. 소음공해가 가장 적었던 그곳에 빠알리어 장경이 잘 보존되어 있어 남방불교의 근거지가 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대승 소승을 논하는 역사의 소음에서 벗어나 우리 귀를 시원하게 해야 하지 않을까.
  지구 사회의 현 상황은, 보다 넓고 보다 높은 획기적 안목을 요구하고 있다. 남북불교의 양 전통으로부터 풀려나 근본불교를 올바로 이해하게 되면, 부처님의 원음을 좀더 똑똑히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거기서 새 시야를 갖추는데 요긴한 조언을 얻게 될 것이다. 완벽한 지혜에서 나온 절실한 말씀들을!

  이 작은 책은 영국에서 나오는 불교 잡지 『상가(sangha)』에 따로따로 실렸던 네 편의 글을 모은 것이다. 소위 상좌부 불교의 전통에 서서 진리에 접근하는 길을 안내하려는 책이다. 내용은 일상생활 속에서 팔정도를 실천하는 길을 관법수행을 위주로 설명하고 있다. 서술은 평이하고 논리적이다.
  다만 근본불교에 접해 보지 못한 분들은 때로 용어 이해가 어렵지 않을까. 하여, 가급적 쉬운 말로 풀어보려 노력했으며 몇 군데는 주(註)도 달았다. 아직 전문술어에 대한 우리말 번역어가 정착되지 않았으므로 문제 점이 많을 줄 아나, 하나의 시행착오적 시도로 간주되었으면 좋겠다. 내용 중 몇 군데, 가령 관법과 정(定) 수행의 대치라든가, 열개의 족쇄가 풀려나는 과정설명 같은 것은 우리들에게 너무 도식적 사유라고 느껴질 것이다. 바로 그 세분화 체계화가 남방아비담마 불교의 특성이다. 이런 점을 감안하고 읽어 나가면, 대승불교가 소홀했던 근본불교의 여러 측면을 새로운 감동으로 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영원한 올챙이

  멕시코에 서식하는 도롱뇽 가운데 `액서러틀'이라고 부르는 특이한 종류가 있다. 이들은 나름대로 악조건의 환경에 적응한 결과 대단히 기이해지고 말았다. 즉 올챙이 상태 그대로 번식하는 특이한 방법을 터득해 버렸기 때문에, 결코 어른으로 성장하는 일이 없게 된 것이다. 하기는 요즈음 와서 우리 인간의 기막히는 과학이 호르몬을 주입시켜 어른 도롱뇽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발견하긴 했지만.
  그런데 이 `영원한 올챙이' 얘기가 도롱뇽 세계에서 그치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인간 세상에도 그와 유사한 현상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인간의 번식은 대단히 자유롭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은 실제로 진정한 성숙인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만다. 올챙이가 올챙이를 낳고, 그 올챙이는 다시 더 많은 올챙이를 낳고 ... 이렇게 미성숙한 인류가 끝없이 번식해 나가고 있다. 게다가 불행히도 인간 올챙이는 도롱뇽 올챙이처럼 마냥 평화로워 보이는 생물만은 아니다. 멋있고 다정하며 놀라운 자질들을 갖추고 있는 반면에, 하이에나의 정나미 떨어지는 몰골에다 굶주린 상어의 식탐(食貪)을 겹친 꼴을 보여주는 일면이 있다.
  이제 이것을 사회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문제는 다음과 같이 요약되겠다.
  "인간이란 동물은 완전히 성숙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미성숙 상태에서도 자유로이 생식을 한다."

  인간 사회의 제반 문제가 근본적으로 여기서 비롯되므로 이것을 깊이 연구하는 데서 불교사회학이란 새 학문이 탄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플라톤도 이 문제를 알고 있었고, 그래서 `철학자왕'을 꿈꾸었다. 만약 철학자들이 충분히 각성한 존재이고, 왕이 될 수 있으며, 또 버티어낼 수만 있다면 틀림없이 그건 바람직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역사기록을 아무리 훑어보아도 그런 일은 있어 본 적이 없다. 많은 독재자들이 그런 `각성한 존재'에 견줄만한 자로 부각되고자 애쓰긴 했지만, 근래에 히틀러와 스탈린 두 경우에서 그 끔찍한 예를 보았듯이 그들의 종말은 우리에게 너무나 낯익은 것일 따름이다.
  역사에는 가끔, 진정으로 자비로운 전제 군주들이 나타나서, 비록 국지적이고 또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많은 선행을 해낸 경우도 있기는 했었다. 서양에선 심지어 교황이나 대사제 등등, 종교 지도자들까지도 그런 시도를 해왔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는 압력을 뿌리치면서까지 이런 놀이에 말려들기를 거부했으며, 불교 경전에 보면 부처님도 출가하시기 전 전륜성왕이 될 수 있었는데도 기어코 다른 길을 택하셨던 것이다.

  불교인은 결코 사회적 문제에 무관심하지 않으며, 불교가 사회문제 해결에 많은 기여를 할 수 있다는 것도 분명하다. 그러나 불교는 언제나 개인으로 시작해서 개인으로 돌아온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는 한 개인으로서만 깨달을 수 있으며, 집단으로서는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낱낱의 인간 올챙이는 그 자신이 마음을 수련하여 발전시켜 나감으로써 성장해야 한다. 완전히 성숙한 인간만이 깨달은 인간인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불교는 깨달은 인간(아라한)을 배출하는 방법에 불과하다. 아라한은, 인간을 세속 사물에 묶어내는 열 가지 족쇄를 부수어 버림으로써, 일체의 갈애와 무지를 극복해내어 다시는 생에 들지 않게 된 사람을 말한다.
  이런 작업은 어쩐지 기가 질리는 엄청난 일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며, 바로 여기에 불교의 희망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인간은 원래 불성을 갖추고 있어서, 도롱뇽이 원래 성숙할 수 있는 것이듯 인간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도롱뇽의 경우처럼 호르몬이나 혹은 다른 어떤 약물을 주사하는, 그런 잔재주가 통하지 않는다. 그 대신 부처님은 깨달음에 이르는 수련과정을 마련하셨으니 그것이 바로 성스러운 팔정도다. 고귀한 성자(ariya)를 배출해내기 때문에 이 도를 `성스럽다'하는 것인데, 그 고귀한 자는 출생이나 혈통에 의한 귀인이 아니라 오로지 정신적인 귀인이다.
  우리들처럼 평범한 대다수의 미성숙 인간 올챙이를 빠알리어로는 `뿌툿자나'라고 부르는데, 속물이란 뜻이다. 이 속물은 팔정도를 실천한 후에야 비로소 `아리야(고귀한 성자)'가 된다. 이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통찰력을 계발하여, 자아라는 허구를 믿고 집착하는 첫 족쇄를 부수고 무아의 내밀한 뜻, 즉 그 자신의 성품을 포함한 일체가 주체성을 지니고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물론 이것은 어떤 `보다 높은 자아'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자아 개념이 모두 허구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결코 지적인 사유를 통해서는 얻어지지 않는다. 그것이 아무리 날카롭고 예리한 사유일지라도. 지성적인 사람들, 특히 자신이 직관적 능력을 지녔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일수록 이해가 안되겠지만 순전히 이론적으로만 무아를 깨닫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깊이 있는 이해일지라도 결코 충분한 깨달음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또 무아의 깨달음은 흔히 얻기 쉬운 여러 경이로운 체험을 통해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약물 따위를 쓰지 않고도 수행자들이 어쩌다 경이로운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무아를 깨닫는 데는 앞에서 얘기한 것들과는 완전히 다른 류의 통찰을 경험해야만 된다. 이런 경험은 오로지 근면, 자기훈련 그리고 정지(正知)로써만 얻어진다. 여기서 불가결의 요소는 정념(正念)의 개발이다. 정념은 팔정도의 여타 항목들과는 무관하게 별도로 얻어질 수는 없다.
  무아의 경험이 제대로 확실하게 이루어지고 그래서 자아의 허구가 그 실상을 드러내 보였을 때 다른 두 족쇄, 즉 회의적인 의념과 의례 의식에 대한 집착도 동시에 사라진다.1) 그러나 이것은 수행의 끝이 아니라 진정한 시작이다. 우선, 나머지 두 가지 `낮은 수준의 족쇄[下分結]' 즉 세상사에 대한 갈애와 염오를 약화시키고,2) 나아가서 이를 완전히 극복3)하려면 더 심원한 통찰의 계기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거기에 가서도 아직 끝나려면 멀었다. 불환과를 이루었다는 것은 `다시 태어나지 않게 되었다'는 뜻으로 사람 몸을 받거나 육도(六途)에 태어나는 일이 되풀이되지 않게 되었다는 뜻일 뿐 궁극의 완성을 이룬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제 저 미묘한 더욱 높은 수준의 족쇄[上五分結]들이 최종적으로 부서지면, `최고의 성숙자' 즉 `완성자'의 출현이 실현되는 것이다. 그는 마음이 더할 나위 없이 청정해서, 일체 욕망과 염오에서 벗어났으며, 지금 이 생에서 이미 열반을 실현한 존재다.
  아라한이라는 이상이 너무나 이기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엉뚱한 논의다. `자기'라는 관념마저 극복한 사람에게 `이기'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겠는가. 그는 `자아'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더이상 관심을 두지 않는다. 말 그대로 아라한은, 허구에 불과한 `자아'의 이익을 좇아 행동하려는 충동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있다. 아라한에 도달하는 길은 남녀·승속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승려는 다만 이 길을 가장 빨리, 그리고 가장 철두철미하게 나아가고자 전 시간을 바치는 전문가일 뿐이며 또 그리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승려는, 다른 일에 종사하기 때문에 더디게 향상할 수밖에 없는 처지의 재가 신도들을 안내하고 도와주어야 할 위치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승려는 기독교의 성직자들과는 엄연히 다르다. 그는 성찬식 같은 일에 매이지 않는다. 대신 선정수행에 정통했을 경우에는 재가 신도들을 도와 성숙한 상태의 통찰력을 출산시키는 산파역을 할 수 있다.

  수행은 길은 곧바르지만 험준하다. 계속 밀어붙이다 보면, 쉬고 싶은 유혹을 강하게 느끼게 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유혹하는 황홀한 곁길이 골고루 나타난다. 경험 많은 안내자의 도움이 없다면 길을 잃고 말 위험성이 십중팔구다. 그래서 승가(불교승단)를 필요로 한다.
  스리랑카에 불교를 전래한 마힌다 아라한은 왕에게, 어떤 나라에서든지 토착인의 승가가 형성되기 전에는, 진정한 의미에서 불법이 세워질 수 없다고 말했다. 이와 같은 승가의 형성은 용이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서구인은 이제 스스로 이 과업을 떠맡았다. 이 목적을 위해 우리는 모두 동참해야 한다. 세계의 올챙이들이여, 단결하라! 당신들이 잃을 것이라곤 당신을 묶고 있는 족쇄뿐이다.




  일상생활과 팔정도

  `일상생활 속의 불교'라는 주제로 사람들이 얘기하는 것을 자주 듣는다. 때로는 이러한 제목을 주제로 강연회도 열고, 심지어 정규 수업마저 베푼다.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그런데 어떤 순간 문득 `불교의 생활화'라니 무슨 뜻일까 의문을 품는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도대체 우리가 불교를 믿는다는 사실이 실질적인 의미를 지니려면 적어도 일상생활 가운데 조금씩이나마 불교의 모습이 드러나야 하는 것이 아닌가. 명분보다는 드러나는 결과를 통해서 사물을 더 똑똑히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니까.
  나는 여기서 일상생활에서 불교를 참되게 실천하는 길은 단순히 팔정도4)를 밟아나가려는 양심적인 노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혹시라도 우리가 몇몇 선(禪)의 기법을 흉내내고 있는 것으로 일상생활에서 불교를 실천하고 있다고 자위하려 든다면, 다음 말하는 전제조건이 갖춰지지 않는 한 중대한 오류를 범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전제조건이란, 기법 이전에 불법에 대한 확고한 이해가 바탕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주변에는 자칭 `스승'이라는 사람들의 최면에 걸린 나머지, 아니면 무지와 자만과 방자함 때문에, 스스로 깨닫지 못한 채 그와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그런데 그 `스승'이라고 뽐내는 사람들을 보면, 뽐내는 만큼 그 반대로 알맹이는 텅 비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 생활불교의 바탕인 도의 여덟 단계부터 이야기해 보자. 팔정도는 지혜·계율(윤리)·선정(마음 길들이기)의 세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이때 지혜는 `낮은' 수준의 지혜를 말하는데, 이 `낮은' 지혜는 `높은' 참지혜를 닦는 데 필수적인 요인이며, 이 `높은' 지혜가 바로 깨달음이다. 이 깨달음은 계율과 선정의 두 공부가 완벽해질 때 비로소 성취된다.
  여기서 잠시 팔정도를 이른바 오근(五根)5) 즉, 신(信)· 정진(精進) ·염(念)· 정(定)· 혜(慧)와 관련시키고 고찰해보는 것이 유익하겠다. 어느 면에서 보면, 이들 다섯 요소 역시 팔정도를 요약한 것 같기도 하니까.6)
  오근의 정진·염·정은 팔정도의 정정진·정념·정정과 따라서 삼학에서의 정(定)과 일치한다. 여기 혜는 `높은' 지혜로 앞의 모든 요소들이 향상된 후에야 비로소 나타나므로, 맨 뒤에 놓이게 된다.
  신(信)은 여기서 정견·정사유의 두 지혜가 낮은 차원에서 초기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을 가리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불교에서 신(信)의 문제는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느껴오던 부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눈을 뜨게 되어 사물을 스스로의 힘으로 분명하게 통찰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상식적 판단에 의해 이들을 수용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신(信0은 확실히 지혜의 초보단계의 한 요소이다.
  초보단계라고는 하지만, 이 단계에 제대로 들어서서 굳건한 신심을 지닌 사람들 가운데서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단계를 완전히 통과하여 넘어설 수 있었을까!
  팔정도의 나머지 윤리적 단계, 즉 정어·정업·정명은 오근에서는 생략되었거나, 또는 정진에 포함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물론 오근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이보다 훨씬 더 `정통적'인 해석방법이 있지만 이와 같은 해석도 한편으로는 도움이 되리라 본다.

  팔정도의 모든 단계는 말할 것도 없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이 단계들이 일상생활에 적용되는 모습을 살피기 위해 편의상 그 중 몇 항목만을 따로 떼어내어 고찰해보고자 한다.
  먼저 용어부터 생각해보자. 원어를 번역하는 데 있어서 역자에 따라 그 용어가 제각기 다르다. 팔정도의 각 단계의 명칭 앞에 붙여진 `삼마(sammā)'라는 빠알리어를 번역할 때도 대부분은 `바른'이란 단어를 쓰고 있다.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등등. 그런데 더 적절한 역어는 `완전한'이란 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삶들도 더러 있다. 삼마 삼붓다(정등각자, 正等覺者) 같은 용어에서는, 물론 그런 뜻이 담겨 있다. 또 `올바른 방향으로'라는 뜻도 있는데, 우리 같은 초심자에게는 이 뜻이 본래의 의도를 가장 잘 전해주는 것 같다.
  가령 내가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고 싶은데 몸은 북쪽을 향하고 서 있다면 나의 방향은 `올바르지' 않은 것이다. 즉 삼마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가장 소박한 단계에서 정견(正見)은 `대강 올바른 쪽으로 방향을 잡는 것'을 의미한다. 바르게 방향을 잡았을 때, 그리고 오로지 그러 경우에만 우리는 목표에 도달할 희망을 안고 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것이다.
  팔정도의 첫 항목을 `올바른 이해', 또는 원어에 더 충실하여 `올바로 봄'이라 번역하는데, 후자가 나은 것 같다. 또 이 `diṭṭhi'란 빠알리어 단어는 신뢰라는 의미도 어느 정도 담고 있으므로 믿음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하겠으며, 또 소박한 뜻에서 직관이라할만한 요소도 역시 내포하고 있다(직관은 여기서는 위험한 표현법이긴 하나 전혀 쓸모없는 것은 아니다). 하여튼 `올바른 이해'란 말을 쓴다면 그것은, 예를 들어 갈애(渴愛)와 고(苦) 간에 존재하는 어떤 연관성을 발견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요즈음 유행하는 사고방식, 즉 무절제한 성적 방종이라든지 탐욕적인 생활태도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으로 기대하는 따위는 `올바른 이해'가 결여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 밖에도 올바른 이해가 내포하는 많은 요소들이 있을 테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히 예를 든 셈이 될 것이다.
  두 번째 항목은 `올바른 사유' 또는 `올바른 동기'로 옮길 수 있다. 첫 번째의 `올바른 이해'로 바르게 본 것을 행동에 옮기는데 알맞은, 그러한 마음상태의 확정을 뜻한다. 예를 들어 탐욕의 위험을 어느 정도 알게 되면, 더이상 집착하지 않을 방도를 개발하게 된다는 … 등등이 바로 `올바른 사유'이다. 따라서 우리는 초보적 지혜만 계발해도, 해야 할 올바른 일을 알게 되고, 또 그것을 할 수 있는 올바른 마음가짐도 갖추게 된다고 장담할 수 있는 것이다. 마음먹은 지 얼마못가, 곧 마음은 있어도 몸이 못따라간다는 것을 깨닫게 되겠지만, 그래도 역시 `보고' 그래서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대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우리는 계율의 단계로 들어갈 때가 되었다. 어느 책에서였던가, "깨달음과는 하등 관계없는 이유를 들어 참선에서는 엄격한 계행을 강조하고 있다"는 취지의 글귀를 읽은 적이 있다. 이 글의 앞 구절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뒷부분의 말은 그릇된 참선병에 걸린 사람들에겐 중요한 말이며, 꼭 필요한 말이기도 하다.
  계행은 팔정도에서는 `올바른 말',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로 나타나고 있는데, 다른 곳에서는 다섯 기본 계율(계율이라는 말보다 수련규칙이 오히려 적절하겠지만)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러한 계율은 시나이 산과 같은 곳에서 신이나 부처님으로부터 부과받은 강요사항은 결코 아니다. 다시 말하면 그 어떤 인간도, 신도, 그 밖의 존재도 우리에게 계를 지키도록 명령한 적은 없다. 그것을 잘 말해주는 것으로서 우리가 일상 봉송하는 계문이 있다. 즉 `나는 살생을 삼가는 수련규칙을 지키겠습니다.' 등등.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요즘 일부 시류에 편승한 철학자들이 나서서, `우리가 전통적 신관(神觀)을 포기한 이상, 어떤 도덕률도 이젠 객관적 근거를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점이다. 불교는 이것이 얼마나 억지소리인지 업의 법칙으로 자세하게 밝혀주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전혀 알아듣지 못하겠다면 이것은 간단히 말해서 `올바른 이해'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약점이 많다. 그래서 이상적인 삶을 사는 데는 매번 실패를 한다. 그러나 팔정도를 걷고자 노력하는 한 그 성과는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반드시 반영되어 나타날 것이다.
  지혜·계율·선정 가운데 마지막 선정에 관해서는 장황한 얘기를 않기로 한다. 물론 선 수행법 가운데 몇 가지 방식은 바로 우리들 `일상생활'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는 그것이 관법(觀法,vipassanā)을, 다른 말로 하면 팔정도의 일곱 번째 항목인 정념의 실천을 의미한다. 그러나 서둘러 정념으로 나아가는 나머지, 그 바로 앞의 항목인 정정진의 `네 가지 중대한 노력'을 간과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네 가지 노력이란 마음의 그릇된 상태를 미리 피하고 또 생겨난 것은 이를 극복하는 노력과, 선한 상태를 개발하고 발전시키는 노력을 말한다. 정정진은 두 번째 항목의 `정사유'와는 서로 지탱해주는 관계에 있으며, 그 다음 항목인 `정념'으로 자연스레 이끌어간다. 그 밖에도 정어·정업·정명을 더 완벽하게 만드는 등 정정진은 팔정도의 모든 항목과 특히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마지막의 여덟 번째 항목, 즉 `올바른 정(定)' 또는 올바른 삼매(三昧)는 특히 중요한 단계일 뿐만 아니라 그 범위도 매우 넓다.
  여기엔 마음을 집중시켜서 가라앉히는 훈련[지·관(止·觀)법의 지(止)]뿐만 아니라 자(慈)·비(悲)·희(喜)·사(捨)의 사무량심(四無量心)7) 공부도 포함된다.
  관(위빠싸나)을 닦는 사람이 반드시 선적 몰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특히 자격있는 스승의 지도를 받을 수 없을 그런 것을 겨냥하지 않는 게 좋으리라는 충고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들떠서 안정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특별히 집중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은 말한 나위가 없다.
  불자가 되어 가지고도 원칙을 실천에 옮기고자 시도하는 노력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불교는 본질적으로, 신앙해야 할 그 무엇이라기보다는 실제 행해야 할 그 무엇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높은 지혜'의 성취가 너무 시간 걸리는 일이어서 금생에 다 이룩해내지 못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성실하게 도를 닦아나가는 사람들은 끝내 해내고 말 것이다. 그들은 무언가 특수한 자질을 갖추게 되어 은연중에 주변 사람들과는 다른 분위기를 지니게 된다. 그들은 마음이 항상 정돈되어 있으며, 자비롭고 남의 처지를 잘 감싸준다. 이런 사람들은 청하지 않는데도 매사에 충고를 주고 싶어 나돌아다니는 사람들과는 다르다. 가만히 있어도 조언이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본능적으로 다가오게 되는 그런 종류의 사람들인 것이다. 난잡하고 도발적인 유혹에 너무 깊이 사로잡혀 있지 않다는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이들은 훌륭한 `세계 시민'이라 할 것이다.




  자기를 구출하자

  어렸을 때 나는 스릴물 소설을 무척 좋아하여 불사신의 영웅들이 엮어내는 모험극 같은 것을 정신없이 탐독해댔다. 이런 이야기들 속에서는, 대개 주인공들이 어느 장면쯤에 가면 영락없이 간악한 적의 손에 붙들려 극도의 궁지로 몰리기 마련이다. 적의 계략에 빠져, 이젠 영영 살아날 길이 없을 것만 같다. 그러나 주인공들은 언제나 기상천외한 묘책을 감추어두고 있다가 최후의 순간, 이 묘수를 써서 멋지게 탈출을 해버린다.
  사실 그 얘기들의 주인공들처럼 우리 역시 제 발로 걸어서 함정 속에 들어온 신세들이다. 자신이 깨닫고 있든 모르고 있든 간에 윤회(輪廻)라는 덫에 걸려 극도의 궁지에 빠져버린 존재들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도 불법(佛法, Dhamma)을 잘 닦으면 멋지게 탈출을 해내어, 수행을 방해하는 마군의 졸개들을 역습할 수 있는 그런 비법들을 터득할 수가 있다. 이때 우리를 궁지에서 건져내 줄 수 있는 비법이 바로 정념이다.
  내가 읽은 여러 편의 엇비슷한 얘기들 속에서는 주인공이, 손발이 묶인 채 물이 점점 차 올라오는 독기서린 지하실이나 토굴 속에 갇혀 있다. 결박을 풀지 못하면 끝장인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가 살아날 길은 전혀 없어 보인다. 두 손, 두 발 모두가 꽁꽁 묶여 꼼짝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어코 도망치고야 만다. 이때 급선무는, 물론 어떻게 해서든지 한쪽 손부터 빼내는 일이다. 이빨을 쓰던가, 감시자의 눈을 속여 교묘히 감추어두었던 연장을 쓰던가 하여 아슬아슬한 순간에 그는 마침내 이 일을 해내고야 만다.
  한쪽 손이 풀려 나가기만 하면 우리 주인공의 처지는 완전히 달라진다. 그는 전보다 힘을 덜 들이고도 다른 손을 풀 수가 있다. 두 손이 풀려나면 발을 푸는 건 일도 아니다. 안심한 적들은 문 잠그는 것을 잊었기 때문에, 이제 그는 언제든지 그 지긋지긋한 곳을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도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윤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불교에서는 해탈에 이르는 길에 네 가지 단계8)가 있다고 가르친다. 첫 단계에 이르렀다 해도 궁극의 해탈은 아직 멀지만 일단 보장된 셈이라고 한다. 따라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소위 말하는 `첫째 도정(道程)의 성취' 혹은 `흐름에 들어서는 것'이다. 이것이 앞에서 얘기한 한쪽 손을 빼내는 것에 해당된다.
  결박에서 한쪽 손을 풀어내는 방법이 바로 `정념 수행'이다. 정념의 가장 근본적인 공덕은, 자아라고 생각하던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는지를 점점 더 깊이 깨달아 가도록 만들어주는 데에 있다. 그래서 마침내 그 언젠가는 `무아(無我, anattā)'의 실상을 분명히 보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단순한 지적(知的) 관찰이 아닌 진리의 직관(直觀)이다. 이런 인식을 하게 되면 종래 자아에 관해 굴리던 고도의 지성적 사유 같은 것은 적절하게 초극해버릴 수 있게 된다.
  이 단계에 다다르면 마음속 깊이 숨어있던, 불법의 진실성에 대한 의념(疑念)은 깨끗이 사라져버린다. 동시에 어떤 형태이든 의례의식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고 망설이던 잠재의식도 사라져 버린다.
  이와 같이 첫째 도정의 성취에서, 우리를 묶고 있는 열 가지 족쇄9) 중 세 가지가 사라진다. 즉 ①개아(個我)가 있다는 믿음, ②불법에 대한 의념, ③의례의식에 대한 집착 등이 사라지는 것이다. 이 단계에 도달한 사람에게는 궁극의 깨달음은 확정적이 되며, 아직도 해탈하기 위해서는 몇 번인가 더 생을 받아야하지만 그 생은 앞으로 일곱 번을 넘을 수 없기 때문에 윤회의 끝이 일단 시야에 잡히게 된다.
  사성제(四聖諦)의 두 번째 진리인 집성제(集聖諦)에 따르면 우리가 거듭 몸을 받아 태어나게 되는 이유는 애착(愛着, taṇhā) 때문이라 한다. 욕망과 혐오의 뿌리는 존재 속에 매우 깊숙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예류과를 얻은 수행자의 심원한 체험을 가지고도 이것들을 곧바로 제거해버리지는 못한다. 그러나 욕망과 혐오가 차차 제거될 것이라는 보장을 받게 된 셈이다. 다시 말해서 한 손의 자유를 얻은 자는 이미 성자의 길에 들어서 있다. 나머지 한 손을 자유롭게 만드는 것은 다만 시간문제이다.

  언제가 되든지 간에 두 번째 도정을 성취하는 순간, 수행자는 `흐름에 들어선 자'로부터 `태어남이 한 번 남은 자'로 변모한다. 세상에 대한 그의 집착은 이미 현저히 약화되어 다시 몸받아 태어나야 하는 일은 한 번뿐인 것이다. 이 일래과의 경험으로 세상에서의 애착과 혐오의 뿌리는 완전히는 아니지만 거의 끊어진다.
  따라서 이 단계는 네 번째와 다섯 번째의 족쇄, 즉 ④감관적 욕망과 ⑤악의가 전적으로 사라진 것은 아니나 결정적으로 약화된 것을 표시한다. 이 과정을 지나서부터는 애착과 혐오는 단지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을 뿐으로 성가신 가치관 정도는 될 수 있을지언정 적극적인 고(苦)의 인(因)으로 발전되는 일은 없게 된다.
  두 손의 자유를 얻으면 소설의 주인공은 이제 한쪽 발을, 그리고는 나머지 한 발마저 풀어낼 수가 있다.
  세 번째 도정을 성취하는 순간 감관적 욕망과 혐오가 완전히 파괴된다. 이 경지에 다다른 사람은 사물에 대해 더이상 그런 감정들을 느끼지 않게 된다. 따라서 이제는 사람 몸 받아 태어나는 일이 없게 된다. 이제 그는 `태어남이 끝난 자'이다.
  그러나 아직 완전한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한 것은 아니다. 낮은 수준의 다섯 가지 족쇄에서는 풀려났지만, 아직도 벗어나지 않으면 안될 더 높은 수준의 다섯 가지 족쇄는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 나머지 다섯 가지란 ⑥색(色)의 세계에 대한 집착, ⑦무색(無色)의 세계에 대한 집착, ⑧만(慢), ⑨도거(掉擧), ⑩무명(無明)이다. 색과 무색의 세계란 선정수행[관수행이 아닌 정(定)수행]에서 즐기게 되는 정(定)의 상태이다. 이 상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세속의 기쁨보다 훨씬 미묘하고도 즐거운 것이다. 그러나 이들 경지마저도 뛰어넘어야 된다.
  이와 같은 높은 경지에서도 만심이 여전히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이런 높은 성취가 바로 나 자신이 이룩해낸 성취라고 생각하는 거기에 다름 아닌 자만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이 만(慢)은 우리가 모처럼 이룩한 향상을 쉽게 낮은 차원으로 끌어내려 버린다.
  도거 역시 이 단계에 이르면 이미 대단히 섬세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일을 끝마치기 위해서 조금 서두르는 듯한 형태로나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무명 역시 아직은 완전히 깨달은 것은 아니므로 어느 정도는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 윤회의 주역인 분별식10)은 지혜의 강력한 조사(照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희미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구극인 해탈은 네 번째 도정을 성취하는 순간 비로소 실현된다. 이를 성취한 사람인 아라한은 이제 더이상 닦을 것도 해야 할 일도 없다. 불사(不死)는 성취된 것이다. 더이상 말할 거리도 이젠 없다.

  이상이 경전에 그려진 공부 길의 각 단계이다. 이 단계들이 실제로 의미하는 바는 오로지 그곳에 도달해보아야만 비로소 파악할 수 잇다. 첫 단계부터가 말처럼 손쉬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겠지만, 누구나 이에 도달할 가능성은 충분히 지니고 있다.
  그것을 성취했는지의 여부는 객관적으로 시험해볼 수 있다. 심령학 내지 심리학적인 갖가지 하찮은 `체험'은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을 것이다. 자만심을 내어 모처럼의 이익을 해치는 일만 없다면 그런 체험들도 그 나름대로 의미는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우리의 목표가 될 수는 없다. 오로지 정념과 정지(正知)11)만이 참된 도의 체험으로 우리를 이끌어줄 수 있다. 이 도의 체험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볼 최대 가치를 지닌 것이 아니겠는가.




  좌선하지 않고 선하는 법

  바르게만 들어가면 선정 공부는 쉽게 되어야 마땅한 공부라고들 한다. 실제로 그렇게 경험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일단 선정에 익숙해지기만 하면 누구에게나 이 공부가 어렵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많은 초심자들이 애를 먹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솔직히 과거에 나 자신도 그러했고, 지금도 때로 힘이 든다.
  사실 내가 불교에 대해서 남보다 잘 아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건 기껏해야 기본적인 여러 장애12)를 나는 빠짐없이 겪었고, 그래서 이것들이 일어나는 경로에 관해서라면 제법 자신있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도거와 의심은 때로는 공존하기도 하는데 이것들은 각기 앞의 세 요소, 즉 욕심·악의·혼침 중 어떤 것이 생겨난 채 물러나지 않기 때문에 걱정하게 되고, 걱정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불법 자체에 관해서, 아니면 적어도 자신의 발전 능력에 대해서 의심을 일으키게 된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공통된 전개양식이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한 가지 해답은 내가 걱정하고 있다는 그 사실을 염려하지 않는 것이다. 한 가지 해답은 내가 걱정하고 있다는 그 사실을 염려하지 않는 것이다. 만일 걱정을 하고 있으며 내가 걱정하고 있다는, 아니 차라리 걱정이란 심리상태가 나타나 있다는 사실을 주시하라. 조금이라도 거리를 두고서 그 사실을 지켜보라. 그럼 상황은 이렇게 된다. 즉 당신은 지금, 당신의 마음의 한 부분을 가지고 나머지 마음이 걱정하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좀더 밀고 나가면 다음 단계에는 훨씬 더 남의 일 보듯 하는 눈으로 사태를 분석할 수가 있게 된다. 이렇게 되면 선정공부는 훌륭히 시작된 것이다. 사실 조금이나마 이렇게 관찰할 수 있으면 당신은 벌써 산정 중에 있는 것이다. 이제는 당신 마음속에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이 공부 법칙을 빠짐없이 적용하도록 하라. `정식으로' 명상하고 앉아있을 때는 물론이요, 나머지 많은 시간 동안에도 마찬가지로 당신을 훌륭히 이 관찰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이제 `정념은 무엇이냐'하는 문제를 생각해볼 때가 되었다. 가장 간단한 대답은 이것이다. 오직 주시하는 것, 가능한 한 많이 그리고 가능한 한 자주, 소위 나라고 불리는 이 우스꽝스러운 정신물리학적 부스러기들의 집합체가 현재 이 순간에 실제로 무엇을 쫓고 있는지 주시하라. 이렇듯 주시하는 습관만 붙여라. 그러면 상당한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다. 믿을 수 없으리만큼 높을 경지에까지도.
  대부분의 순간을 우리는 꿈결처럼 지내고 있을 따름이며, 무언가 일이 일어나면 순전히 자동적 감정 반응으로 대응할 따름이다. 이렇게 지내기를 그만두는 일이 쉽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내'가 실제로 하고 있는 일이 과연 이런 것이구나 하고 지켜보기 시작하는 것이 그렇게 힘들지는 않을 것이다. `결과를 기대하지 말라'는 충고를 자주 듣는데, 적절한 충고다. 그런데도 당신은 기대할 것이다. 그럴 때 당신은 오로지 `지금 내가 결과를 기대하고 있구나'하고 주시하면 된다.
  여러 해 전 나는 조그만 책자에 실린 지침을 따라 선정공부를 시작했다. 수주일간은 열심히 했는데 차차 싫증을 느끼게 되었다. 하나마나인 것 같을 뿐 진척이라곤 없는 듯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걸 집어치워 버릴까 하는 참이었는데,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되는 어머니와 아내가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전처럼 화를 벌컥벌컥 내지 않아서 같이 지내기가 한결 수월하다는 얘기를. 그렇다. 무언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오로지 주시하기를 익히라.
  어떤 사람들, 특히 융(Jung)이 말하는 외향적 감각형의 사람들은 바깥 사물을 주시하는 데 뛰어나다. 이런 사람들은 타인의 행동거지, 옷차림 같은 것들을 세심히 관찰하고 기회만 있으면 장황한 논평을 늘어놓는다. 그들의 평은 대개 비판적인 내용들이다. 만일 마음에 안드는 것을 보았다면, 노골적으로 그렇게 말한다. 또 본 것이 마음에 들면 이번엔 선망이나 질시의 어투로 논평을 가한다. 당신이 혹시 그런 태도로 남을 보고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그런 태도에 대해 객관적이 되도록 노력하라. (`그래, 그가 손톱을 물어뜯는구나. 그럼 어때?'하는 식으로) 그래도 정히 반감을 누를 수 없을 땐, 이젠 당신 마음속에 반감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라.
  이런 방식으로 남을 관찰할 때에는 사실은 자신의 반응까지도 어느 정도 관찰하고 있는 것이다. 상대방이 정말 혐오를 주는 인물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문제는 `당신의' 반응이다. 그렇다고 길에서 만나는 때투성이 히피족을 일일이 다 사랑하겠다고 너무 애를 쓸 것까진 없다. 그건 지나친 요구다.
  다시 비근한 예를 살펴보자. 우리는 종종 남에게 마음이 이끌리는 경험을 한다. 이럴 때 그 사람을 놓고 무얼 어쩌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가져보지 않았다 치더라도, 그런 나머지 너무 경건해져서 `나는 어떤 사람에게도 성적으로 사로잡히는 법은 없어.'하는 식으로 최소한 자신을 속이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혹시 그런 쑥스런 생각이나 느낌이 일어날 경우에는 다만 그 생각이나 느낌을 주시하라. 요즘 세상은 관심을 빼앗아가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따라서 내가 관심을 가지고 주시하고 있다는 그 사실만을 주시하라. 긍정적으로 보느냐, 부정적으로 보느냐 하는 건 이미 문제 밖이다.
  사람들이 일상생활 속의 불교에 대해 말하는 것을 자주 듣는다. 이 관법수행이야말로 불교를 일상적으로 생활화하는 근본요체다. 무얼 보든, 듣든, 냄새맡든, 맛보든, 만지고 또 생각하든, 그 결과 당신 마음(과 육체)속에 일어나는 것만 주시하라. 낙심하지 말라. 다만 주시하라. 그래도 여전히 낙심이 될 때엔 그 느낌마저 놓치지 말고 주시하라. 이 얼마나 쉬운 공부인가.
  이제 조금 더 나아가 보자.
  여기 좋은 규칙이 하나 있다. "자기 자신에게 변명하지 말라." 좋아, 어쨌든 나는 명상하고 싶지가 않다(또는 세수하고 싶지 않다든지, 아침에 일어나고 싶지 않다든지, 또는 뭔가 해야만 할 일을 하기 싫다). 이 때 `나는 하고 싶지 않다' 또는 더 적절한 말로 `하고 싶어하지 않는' 그 마음을 주시하라. 끝내 그 행동을 안하고 말는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당신은 그런 사실을 주목한 것이다. 어쩌면 아직도 당신은 스스로에게 계속 변명을 늘어놓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사실 또한 주시하라!
  얼마 동안 이렇게 하다보면, 마침내 당신 속에서 더 좋은 방향으로 인격적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은 하나의 엄연한 사실이다. 이 사실을 남들이 벌써 알아차리고 말해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데 당신 자신은 깨닫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내가 요즘 얼마나 나아졌을까 누군가 말해주었으면 좋겠는데 하는 마음을 가졌거든 물론 이 생각이 일어나는 양도 주시하라. 이렇게 해 나가면 마침내 이 공부는 참으로 재미있는 놀이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해볼 수 있는 놀이는 얼마든지 있다. 가령 어떤 사람들은 술이나 음식 같은 것을 권유받았을 때, `네 좋습니다' 한다. 그러나 이럴 때 `아니오, 괜찮습니다'라고 대답하는 놀이를 해보면 어떨까? 지금 당신이 술 한잔을 권유받았다고 가정하자. 불교의 제 오계인 `불음주계'를 잊지 않고 있기에, 당신은 `훌륭한 불자'가 되려면 마땅히 거절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실제 행동은 어떻게 나타나게 될까? 나는 여기서 당신이 불자가 되기 전에 가끔씩 술 한잔 마시고 기분을 돌이키는 걸 전적으로 반대만 하던 사람은 아니었다고 일단 가정해둔다. 어차피 세상에 그런 이들이 많으니까.
  이 때 물론 당신은 마음속으로 오히려 한 잔 마시고 싶은 마음이지만 용기를 내어 딱 거절해버릴 수도 있다. 그건 그대로 훌륭하다. 그런데 반대로, 당신의 불심을 잠깐 제쳐두고 술잔을 받아버릴 수도 있다. 물론 후자를 권하는 건 아니다. 다만 그렇게 되는 수도 있다는 얘긴데, 이 때 당신을 요즘 서구식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대단한 긍지를 갖고 으레 내뱉는 전형적 어투로, `물론 좋고 말고요' 하고 너스레까지 떨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때 당신은 마음속으로 자신에게 가볍게 반문해볼 수 있을 것이다. `안 마시면 안될까' 그러면 그 안 마신다는 생각을 능히 감내해낼 자신을 찾게 되어 편안히 거절하게 될 가망성도 꽤 높다. 하지만 꼭 마시고 싶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처리는 자신에게 달렸다. 십중팔구 그럴 때는 술잔을 받게 될 것이다. 인간성은 그런 편이니까. 그런 경우에도 거기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일일이 지켜보아야 한다. 물론 술맛이 조금은 달아나버리겠지만 일단 그렇게 하면 다음 번엔 술을 대해도 그렇게 마시고 싶어 급급해하지는 않게 될 것이다. 하여튼 당신은 무언가 얻은 것이 있을 것이다. 어쩌다가 한 번이라도 즐기는 일을 권유받았을 때 `아니, 별로 생각이 없어'하고 말하게 되고, 또 그것이 헛말만은 아니게 된다면 당신은 조금씩 향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갈망하는 것이 많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이 세상에 와 있을 리도 없다. 따라서 `이번에는 또 어떤 쾌락에 쉽게 저항할 수 있게 되었나'하고 확인해 나가는 일은 대단히 멋진 놀이가 아닐 수 없다. 요컨대 당신이 여간 간절히 원하는 것이 아닌 한 `아니오'하기가 쉬워져야 한다. 작은 실례로 세일즈맨들의 공세를 거절하는 힘을 키우는데 이 방법을 써보면 좋을 것이다. 이처럼 상업주의가 범람하는 세상에서는 그런 것도 요긴한 일일 테니까.

  이밖에도 당신 스스로 비슷한 놀이를 몇 개쯤 더 생각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놀이를 즐기다 보면 이 기본적 `주시' 공부가 더 재미있게 될 것이다. 공부할 때는 공부를 즐기는 것이 좋다. 그러나 공부를 즐기고 있는 자신을 반드시 주시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This translation was possible
by the courtesy of the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54, Sangharaja Mawatha
P.O.BOX 61
Kandy, Sri Lanka


보리수잎·하나
영원한 올챙이
지은이 : 엠오시 월슈
옮긴이 : 강대자행
펴낸이 : 한기호
펴낸곳 : 고요한 소리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72번지(우 110-300)
전화 :02)739-6328, 725-3408 전송 : 02)723-9804
홈페이지 : http://www.calmvoice.org
E-mail : calmvs@hanmail.net
부산지부 051)513-6650·대구지부 053)755-6035

출판등록 : 제 1-879호. 1989. 2. 18.

ISBN 89-85186-01-9 02220
값 500원




▲〈고요한 소리〉는 근본불교 대장경인 빠알리 경전을 우리말로 옮기는 불사를 감당하고자 발원한 모임으로, 먼저 스리랑카의 불자출판협회(BPS)에서 간행한 훌륭한 불서 및 논문들을 국내에 번역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작은 책자는 근본불교·불교철학·심리학·수행법 등 실생활과 연관된 다양한 분야의 문제를 다루는 연간물(連刊物)입니다. 이 책들은 실천불교의 진수로서, 불법을 가깝게 하려는 분이나 좀더 깊이 수행해 보고자 하는 분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책의 출판비용은 뜻을 같이 하는 회원들이 보내주시는 회비로 충당되며, 판매비용은 전액 빠알리경전의 역경과 그 준비사업을 위한 기금으로 적립됩니다. 출판비용과 기금조성에 도움주신 회원님들께 감사드리며 〈고요한 소리〉모임에 새로이 동참하실 회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해

1) 예류과의 성취 본문으로

2) 이 두 가지 족쇄가 거의 무력해지는 단계로, 일래과를 말함. 본문으로

3) 불환과의 성취 본문으로

4) 팔정도(八正道, aṭṭhangika-magga) : 고를 완전히 없애기에 이르는 여덟 가지 수행종목. 경에 `불교에는 팔정도가 있고, 외도에는 팔정도가 없다'고 말씀하실 만큼 불교의 핵심을 이루는 성스러운 진리.
⊙ 정견-사성제를 아는 것
⊙ 정사유-욕망·악의·잔인성에서 벗어난 생각
⊙ 정어-거짓말·수다스러움·거친 말씨·어리석은 잡담을 하지 않는 것
⊙ 정업-살생·도적질·간음을 하지 않는 것
⊙ 정명-남을 해치게 되는 생계수단을 피하는 것
⊙ 정정진-악한 것을 피하고, 또 극복하며, 선한 것을 계발하고 유지하는 것
⊙ 정념-몸·감각·마음·마음의 대상을 주시하기를 잊지 않는 것
⊙ 정정-마음이 집중되어 바른 선에 드는 것. 본문으로

5) 오근(五根, pañca indriya) : 해탈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다섯 가지의 힘 또는 능력. 신근·정진근·염근·정근·혜근을 말함. 본문으로

6) 팔정도·오근·삼학의 관계

본문으로

7) 사무량심(四無量心, cattasso appamaññayo) : 불교인이 가져야 하는 네 가지 마음가짐.
· 자(慈, mettā) : 사랑과 우애의 마음
· 비(悲, karuṇā) : 연민하는 마음
· 희(喜, muditā) ; 남의 성취·행복을 자기의 것처럼 기뻐하는 마음
· 사(捨, upekkhā) : 안팎의 경계에 끄달리지 않고 항상 평정한 마음. 사랑하되 욕심에 빠지지 않고, 연민하되 걱정에 빠지지 않고, 기뻐하되 홍소(哄笑)에 빠지지 않는 중정한 마음. 본문으로

8) 사과(四果) : 해탈에 이르는 `초월의 길'에 들어선 성자가 차례로 겪는 네 가지의 경계.
① 예류과(預流果, sotāpanna) : 흐름에 들어선 경계.
② 일래과(一來科, sakadāgāmi) : 태어남이 한 번 남은 경계.
③ 불환과(不還科, anāgāmi) : 태어남이 끝난 경계.
④ 아라한과(阿羅漢科, arahat) : 깨달은 경계. 본문으로

9) 열 가지 족쇄 : 인간을 윤회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도록 묶고 있는 족쇄.
① 개아가 있다는 믿음(sakkāya-diṭṭhi) : 인간을 기만·오도하는 가장 근본적인 삿된 견해로, 인격 또는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② 계율·의식에 대한 집착(silabbata parāmāsa) : 형식적 계율과 의식을 지킴으로써 청정해질 수 있다는 견해에 집착하는 것. 본문에서는 의례·의식(rites and rituals)이라 썼다.
③ 법에 대한 의념(vicikicchā) : 불·법·승·수행의 필요성·연기법 등을 회의하여 의심하는 것.
④ 감각적 욕망(kāmarāga) : 감관적 쾌락에 대한 욕망.
⑤ 악의(惡意, paṭigha) : 질투·원한·분개·화냄 등의 뜻. 성내는 마음[瞋心]과 동의어.
* * * 이상은 낮은 수준의 다섯 족쇄, 다음은 미묘한 높은 수준의 다섯 족쇄 * * *
⑥ 색(色)의 세계에 대한 집착(rūparāga) : 감관적 쾌락에 대한 집착을 벗어났을 때 나타나는 순수 물질의 세계에 대한 집착.
⑦ 무색(無色)의 세계에 대한 집착(arūparāga) : 색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났을 때 나타나는 순수 정신세계에 대한 집착.
⑧ 만(慢, māna) : 아만·긍지·자만·내가 남보다 낫다·못하다·동등하다 하는 마음.
⑨ 도거(掉擧, uddhacca) : 들뜨고 불안한 마음.
⑩ 무명(無明, avijjā) : 속세의 모든 악과 고통의 근본뿌리. 이 때문에 지혜의 눈이 가리어 사물의 진정한 본성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또는 사성제를 모르는 것. 본문으로

10) 분별식(viññāna) : 사물을 실상 그대로 보지 못하고, 상대적으로 분별하여 인식하는 기능. 나와 남을 구분함으로써 자아의식을 형성하게 되는 기본요인으로서 오온의 마지막 항. 십이연기의 제 3항이 됨. 본문으로

11) 정지(正知) : 올바로 살펴 알아차리는 것. 빠알리경에서는 정념 대신 정지정념(正知正念)이란 표현을 쓰는 경우도 많이 있다. 본문으로

12) 오개(五蓋, pañca-nīvaraṇa) : 수행을 하는데 일어나는 다섯 가지 장애로 탐욕·진에·해태와 혼침·도거와 회한·의심을 말함. 좀더 자세히 이해하려면 법륜·아홉 다섯 가지 장애와 그 극복 방법 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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