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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修禪要訣
이름 phoenix 날짜 2014-10-15 [19:15] 조회 8377
 
이 글은 당나라 때, 선법이 중국에 들어온지 오래지 않아서 修禪하는 사람들이 그 요령을 몰라서 헤매는 경우가 많았을 때, 인도의 선사인 불타파리와 중국의 한 학인이 禪 수행의 요점에 대해 대화를 나눈 것을 기록한 것입니다. 읽어보면, 당시의 인도 불교의 수행전통이 어떠했는지, 그리고 중국의 선불교가 그때 이미 원형과 얼마나 달라졌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1300여년 전의 글이지만 오늘을 사는 수행인에게 여전히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禪을 닦는 중요한 방법

머릿말

옛날 安世高와 法護가 禪經을 번역했고, 僧光과 曇猷 등도 또한 가르침에 의지해서 마음을 닦았다. 나중에 구마라집公께서 關에 들어가니 僧叡가 禪法의 要點을 번역해줄 것을 부탁한 이래 이따금 그런 사람이 있었다. 달마가 서쪽에서 오고 僧稠가 동쪽에서 일어난 이후로 이 禪의 추세가 크게 떨쳐 일어났다. 그러다가 唐나라 중엽에 이르러 金剛智와 善無畏 등의 三藏法師가 秘密禪을 傳함으로써 별도의 流派가 되었다.
지금 아래에 傳하는 이것은 그 뜻이 顯敎와 密敎를 겸했고, 方法은 中國 것과 印度 것을 갖추었으니, 참으로 요긴한 방법이다. 이전에 몇 가지 판본을 얻어 校正하여 상자에 보관했었는데, 朱盈 居士에게 믿음이 있는 사람이 있어서 그가 내가 그것을 새겨서 널리 유통시키길 바랐다. 내가 말하길, “彌天 釋道安이 이르기를 ‘고요히 생각하여 玄을 지키고, 미세한 것을 단련하여 寂滅에 들어가 것이 어떤 방법을 취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했는데, 이제 그 방법이 손바닥을 보듯 분명하니, 이 要點을 버리고서 證驗이 나타나길 바란다면,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佛道에 들어가는 요긴한 門이 대개 이를 넘어서는 것이 없다. 이제 자네가 그것을 추천했으니 누군들 隨喜하지 않으리오. 이런 까닭에 서문을 쓰노라.
天明 4年 甲辰年 겨울 播磨의 沙門 智暉 撰

修禪要訣

北 인도의 바라문 出身의 禪師인 붓다빨라[覺愛]가 질문하는 대로 간략하게 說明하고, 西京의 禪林寺 沙門 明恂이 묻고 아울러 말하는 대로 기록했으며, 같은 절의 인도 僧侶인 慧智 法師가 통역하니, 때는 唐나라 儀鳳 2년 丁丑年이었다.

󰃅 1 이곳은 예나 지금이나 禪을 배우는 이들 대부분이 禪을 하는데 있어서 장애와 어려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보건대, 이곳의 禪匠들이 얻은 法이 완전하지 않아서 결단을 내리지 못한 것이 오래되었으니 장차 의심을 말할 곳이 없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됩니다. 이제 홀연히 우담바라 꽃과 같이 만나기 희유한 기회를 우러러 만나 가르침과 깨우침을 받으려 하였지만 스님께서 인도로 還國하려 하시니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할 수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慈悲를 내리시어 禪의 要點을 빠짐없이 말씀해 주시어 배우는 사람들이 명확하게 돌아가 의지할 곳이 있게 하소서.
󰂼 禪法은 점차로 가르쳐 주는 것이니, 한꺼번에 설명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어떻게 다 말 할 수 있겠는가?

󰃅 2 뜻은 받잡겠지만, 이미 西天으로 돌아가려하시니, 점차로 가르침을 주신다면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佛法에 이미 開制(anujñā-pratiṣedhanatā 앞서 制定한 것을 깨는 일)가 있사오니, 바라옵건대 은혜를 베푸시어 이 기회 이 인연을 막지 말아주소서.
󰂼 이 사실에 근거한다면 가엾다 할만하다. 다만 질문이 있으면 그에 따라 대답하는 것만 허락하겠다.

󰃅 3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經에서 말하는 禪定堅固란 如來께서 滅度한지 세 번째 500년을 말한다. 지금은 이미 그 때와 먼 시기이므로 禪을 닦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禪을 닦는 것이 맞지 않는 게 아니겠습니까?
󰂼 經에는 그런 말뿐만 아니라 禪을 닦으라고도 많이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선 본래 없어지지 않는다는 점에 근거한다면 멀고 가까움을 어찌 논하겠는가? 西方에서는 지금도 坐禪하여 四禪八定을 얻는 자가 지극히 많아서 그 수를 다 셀 수 없을 정도다. 만약 ‘맞지 않다’고 말한다면 이 [명백한] 사실은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三慧 중에서 禪은 修慧다. 지금이라고 해서 어찌 聞慧와 思慧만을 배우고 修慧를 허락하지 않는 게 옳겠는가? 그 말은 지나치게 치우치게 근거한 것이지, 전체에 통하는 말은 아니다. 비록 부처님의 경전에서 인용한 말이라 할지라도 게 중엔 잘못된 것도 있고 옳은 것도 있다. 더욱이 聖敎에서 나온 한 文章만을 치우치게 제시하여 그 밖의 많은 문장에 나타난 뜻을 덮어버린다면 이는 魔軍의 말에 해당할 뿐이니, 그 점을 자세히 살펴야 옳고 그 점을 자세히 살펴야 옳다.

󰃅 4 근래에 禪을 배우는 사람들을 보니, 精神異常이 와서 하던 것을 이미 그만 두게 했지만 다시는 쓸모가 없어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일생을 헛되이 보내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 마음은 이 때문에 다만 다른 것을 닦았으면 싶은데, 일단은 禪을 닦지 않아도 되겠지요?
󰂼 안 된다. 禪은 6바라밀 중에서 다섯 번째이자 三學 중의 定學인데, 어찌 닦지 않아도 되겠는가? 어떤 사람이 음식을 먹다가 목에 걸려 죽었다 해서 어찌 음식을 먹지 않는단 말인가? 그 상심했던 사람들은 방법이 좋지 못했던 것뿐이다. 만약 방편을 쓸 줄 안다면 千 사람 萬 사람이 하더라도 잘못되는 일이 없다. 그러니 의심하거나 겁내지 말고 반드시 닦기를 바라노라. 北 인도의 한 스님은 매양 多聞을 익히고 定은 익히지 않았었는데, 어느 날 경을 읽고 있던 차에 홀연히 天神이 내려와서 그의 입을 막고는 ‘(그만하면) 그대에게 聞과 思는 충분한데 어째서 禪을 익히지 않소?’고 말했으니, 이 逸話는 설사 여타 다른 수행을 닦더라도 定을 배우지 않는다면 佛法에 있어서는 아직 완전하게 얻는 것이 못 된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이다. 

󰃅 5 마음이 많이 산란한 성질을 가진 이는 定을 배울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원숭이도 오히려 坐禪을 할 수 있거늘, 하물며 사람이 못하겠는가? 定을 배우는 것이 어려운 것은 다만 前生에 익힌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어렵다고 해서) 今生에 또 다시 배우지 않는다면, 來生엔들 어찌 될 수 있겠는가? 이미 오랜 세월 동안 될 수 없었거늘 다시 어느 때를 기대할 수 있으랴. 經에서 이르기를, “聞과 思는 여전히 門 밖과 같다. 禪行이 있어야 비로소 門 안에 들어 온 것과 같다.”고 했다. 禪을 한 순간만 닦더라도 그 복이 無量하거늘, 어찌 평생을 배우지 않는 것이 특별히 옳으랴. 설사 坐禪만을 전적으로 배울 수 없는 이라 할지라도 그것과 좌선을 겸하여 닦는 것이 좋다. 講說하는 사람이 비록 禪法에 대해 이런 저런 말을 議論한다하더라도 이는 마치 밥에 대해 말하면서도 입에 넣지 않는 것과 같다. 禪을 實行하는 데 이르러서야 비로소 맛난 음식을 배불리 먹는 것과 같다. 옛날 어떤 國王은 參禪의 이익을 듣고서 나라 일을 처리하면서도 禪을 익히는 것을 겸하였거늘, 하물며 머리와 수염을 깎고, 인연을 막고, 마음을 쉬고, 일이 없는 出家한 사람이 조금도 배우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이라 하리요?

󰃅 6 禪을 배울 때 오직 앉아서만 합니까?
󰂼 이 무슨 소리인가? 有待인 몸은 4威儀 가운데서 자세를 바꾸면서 닦는 것이 필수적이다. 어찌 단지 앉을 수만 있겠는가? 앉기만 하면 魔事를 초래하는 경우가 많다.

󰃅 7 우선, 4威儀중에 坐法은 어떠합니까?
󰂼 結跏하고 곧게 앉는다. 책상다리를 맺는 법은, 왼다리로 오른 다리를 누르고 오른 다리로 왼다리를 누르면 된다. 만약 結跏가 불편하면 半책상다리도 좋다. 半跏하는 法은 단지 오른 다리가 왼다리를 누르는 것이다. 두 손은 각각 위로 보도록 편다. 손바닥도 역시 오른손이 왼손을 누른다. 결코 왼손이 오른손을 누르게 해서는 안 된다. 눈은 감고 입은 다문다. 혀는 윗턱[上顎]에 멈추거나 이빨에 멈추어도 된다. 눈을 감고 입을 다무는 것 등은 결코 급하게 해서는 안 된다. 나아가 모든 일을 느긋하게 따르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쥐가 나거나 경련이 일어나게 할 필요가 없다.
눈을 감는 것이 익숙하지 않는 이는 때때로 그러고 싶을 때마다 눈을 조금 뜬다. 오래도록 앉음으로써 피곤하고 싫증나면 자세를 바꿀 것이며 고통이 생기게 하지 말라. 다른 자세도 모두 이것에 따른다.

󰃅 8 이곳에선 서로 전하길 오른 손 등은 많이 움직이므로 앉는 자는 반드시 왼손으로 오른 손을 누르게 합니다. 지금 말씀은 그것과 크게 다르니 어떤 까닭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 西方의 모든 깨달은 분들께서는, 부처님 이후로 서로 이어온 坐法이 (예외 없이) 모두 이러했다. 아울러 手印法도 이곳에선 멋대로 고쳤는데, 나로서는 알지 못하는 것이다.

󰃅 9 坐禪할 때, 물건에 몸을 기대거나 몸을 숙이거나 우러러보는 등 마음 내키는 대로 앉아도 됩니까?
󰂼 반드시 몸을 곧게 세워 단정하게 앉아야 한다. 몸을 물건에 기대거나 굽히면 병통이 생긴다.

󰃅 10 앉는 것에 대해선 잘 들었습니다. 거니는 법[行法]은 어떻습니까?
󰂼 거니는 것은 經行이다. 장소는 그 길이가 20 걸음이상 40 걸음이하 되는 평탄한 땅에 의지해서 그 가운데서 經行을 한다. 經行을 할 때는 왼손을 뒤집어서 엄지를 굽혀서 손바닥 가운데 붙이고 나머지 네 손가락으로 엄지를 쥐고서 주먹처럼 만들고, 오른 손은 뒤집어서 왼손의 손목을 쥔다. 端正하게 조금 앉아서 마음을 거두어 들여서 코 끝 등에 머물게 했다가 걷는다. 걸음은 너무 급해도 안 되고 너무 느려도 안 된다. 걷는 동안에는 마음이 흔들림 없게 하다가, 걸어서 경행 track의 끝에 도달하면 해가 도는 방향으로 몸을 돌려서 온 곳으로 돌아온다. 잠깐 멈추어 서 있다가, 앞에서와 같이 다시 걷는다. 걸을 때는 눈을 뜨고, 멈추어 서면 즉시 눈을 감는다. 이렇게 오래 걷다가 점점 지겨워지면 經行을 쉰다. 經行은 낮에만 하고 밤에는 하지 않는다.

󰃅 11 많은 사람이 같은 장소에서 經行해도 됩니까?
󰂼 서로 조금 떨어져서 經行해야 한다. 가까이서 해서는 안 된다.

󰃅 12 行이 참으로 이와 같다면, 옛적의 賢哲들께선 모두 어째서 이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셨을까요? 부디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서 확실하게 말씀해주십시오. 그러시면 어떻게든 이제라도 저부터 옛 것을 행하겠습니다.
󰂼 우댜나國에는 부처님께서 經行하시던 곳과 미륵보살이 경행하시던 곳이 있는데, 이 두 곳 모두 돌로 조각하여 두둑처럼 둘러싸서 오늘날도 여전히 그 자취가 뚜렷하다. 이를 본 사람은 모두 멀리서 예배할 뿐, 감히 그곳을 밟는 사람은 없다. 미륵보살이 경행하던 곳은 간혹 사람이 들어가는 경우가 있는데, 그 길이를 재보려고 하면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하여 그 경행처의 길이가 몇 걸음 되는지 결국 定할 수가 없다. (그곳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나라에도 이런 자취가 있다. 經行하는 일은 생각컨대 언제나 해오던 대수롭지 않은 일이요, 그 증거는 古今에 분명하니 의심하여 망설여서는 안 된다. 아아, 이런 사소한 일조차도 이곳에선 오히려 알지 못하는구나!

󰃅 13 탑을 돌면서 도는 것과 經行은 어떻게 다릅니까?
󰂼 經行이란 곧게 가서 곧게 오는 것이거늘 어찌 빙빙도는 것과 같겠는가? 또 탑은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곳이다. 그 가운데서 경행해서는 안 된다.

󰃅 14 이곳 中國에서는 해를 거스르면서 둘레를 도는 것을 “오른쪽으로 돈다.”고 하는데, 이것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 西方(즉 印度)에서는 탑을 돌 때 모두 해가 가는 방향을 따라 돈다. 반대로 걸은 적이 없다.

󰃅 15 걷는 것에 대해선 잘 들었습니다. 머무는 법[住法]은 어떻습니까?
󰂼 머무는 것은, 몸을 곧게 하고 마음을 거둔 채로 바르게 서는 것이다. 두 손은 걸을 때와 같다. 이렇게 오래 서 있다가 점차로 勞倦해지거나 두 발이 땅에서 떨어진 느낌이 들면 당분간 쉬어야 한다. 나머지는 좌법과 같다.

󰃅 16 머무는 법에 대해선 잘 들었습니다. 눕는 법[臥法]은 어떻습니까?
󰂼 오른 옆구리를 바닥에 붙이고 오른손의 손바닥을 벤다. 두 발은 펴서 겹치게 쌓고서 매듭 모양으로 눕는다.(繫相而臥) 病이 있는 患者는 편한 대로 눕는다.

󰃅 17 여러 가지 위의 중에 있는 본보기가 모두 印法입니까?
󰂼 위와 같이 禪을 익히면, 行住坐臥하고, 굽히고 펴고, 나아가고 멈추고, 손발의 左右의 위치 등의 낱낱이 모두 印法이다.

󰃅 18 위와 같은 威儀로 禪을 닦는 것은 어느 乘을 의지한 것입니까?
󰂼 마하연(즉 大乘)에 의지한 것이다.

󰃅 19 네 가지 威儀로써 禪을 닦는 법이, 어찌 小乘과 外道에도 없겠습니까?
󰂼 이러한 禪法은 小乘에도 처음부터 없었거늘, 外道에 어찌 있겠는가? 그릇된 종교에서는 본래부터 고통을 받기를 기약하느라 발을 들거나 거꾸로 매달린다. 하지만 바른 법에서는, 疲勞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라서 威儀를 쉽게 바꾼다. 小乘에는 혹 부분적으로 있다고 할 수 있겠으나, 外道에는 전혀 없다.

󰃅 20 外道와 三乘에 모두 禪定과 마음을 쉬고 경계를 놓아주는 것이 있는데, 그것과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 外道는 나[我]에 집착하면서 禪을 닦고, 小乘은 法을 헤아리면서 定을 닦는다. 하지만 大乘의 止觀은 人[主觀]과 法[客觀]을 모두 제거하니, 이것이 그 차이다.

󰃅 21 장차 禪을 배우려 한다면 어떤 방편을 앞세워야 합니까?
󰂼 먼저 大慈悲心을 일으켜 원한을 갚으려는 생각을 영원히 버려야만 비로소 禪을 익힐 수 있다. 貪心과 瞋心이 설사 일어나더라도 재빨리 원래 상태로 돌아와 제거하고 뉘우치기를 막대기로 물을 치면 잠시 벌어졌다가 원상태로 합쳐지듯 해야 한다. (만약 이렇지 않고) 나쁜 생각이 이어진다면 禪을 배울 수 없다.

󰃅 22 처음 禪을 배울 때 無相을 관찰해도 됩니까?
󰂼 반드시 적절한 수단을 써서 점차로 無相觀에 들어가야 한다. 나는 아직 無相이 단숨에 나타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 23 漸次는 어떻게 합니까?
󰂼 이 같은 요즘 배우는 사람들이라면, 마음을 먼저 長安의 한 城 안에 머물게 하고, 그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한다. 이렇게 해서 점차로 한 절에 머물고, 한 방에 머물게 하다가, 코끝에 머물게 한다. 마음이 머물지 못하면 다시 거두어서 (본래 머물게 하려던 곳에) 머물게 한다.

󰃅 24 마음이 코끝에 머물게 하는 법은 어떠합니까?
󰂼 코끝에 한 방울의 이슬이 놓여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에 마음을 머물게 하여 관찰한다.

󰃅 25 이 생각이 성취되면 다시 무엇을 관찰합니까?
󰂼 다음엔 배꼽 가운데를 모래 속의 작은 샘이라 생각하라. 이 생각이 완성되면, 光明이 보이거나 배속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일이 보인다. 그 다음 단계는 정수리 위의 모양이 단지의 입과 같다고 觀想(視覺化하는 것)하고, 그 입이 곧바로 아래로 몸을 뚫고 아래로 땅 속까지 뚫려있다고 생각하라. 이런 생각을 하고나서, 다음엔 정수리를 생각하고 나서 정수리 위에 정수리에서 네 손가락(즉 약 8cm) 떨어진 곳에 마음이 머물게 하라. 이 이후로는 몸에서 점차로 자유롭게 될 것이니, 그 다음엔 無相 등의 觀에 들어갈 수 있다. 이렇게 얕은 데서 깊은 곳으로 이르는 양상이, 마치 사다리를 점차로 오르는 것과 같다.

󰃅 26 코끝을 생각하는 단계에서 (중간단계를) 초월하여 바로 無相觀을 얻는 사람도 있지 않겠습니까?
󰂼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모래흙 속에서 본래는 銅이나 鐵을 구했지만 어떤 경우로 인해 金을 얻기도 하는데, 이것도 그렇다. 코끝을 반연하다가 혹 정수리를 생각하는 단계로 들어가기도 하고, 혹은 火光定에 들어가기도 하고, 혹은 無相 등을 얻기도 한다. 이렇게 그 차례와 중간을 건너뛰는 것은 정해져 있지 않다.

󰃅 27 金剛經에서 말하기를 ‘만약 마음이 머무는 곳이 있다면 머무는 것이 아니다.’고 했고, 어떤 이는 ‘마음이 대상에 의지하면 이것은 움직임이지 禪이 아니다.’고 했습니다. 만약 코끝 등을 반연한다면 어찌 머묾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 코 등의 생각이 이루어지면 즉시 그것을 버리고 다시 그 밖의 모양을 觀한다. 얻자마자 금방 뒤이어 버리거늘 어찌 머묾이 이루어지겠는가?

󰃅 28 코끝 등을 반연하여 생각을 쌓음이 성취되면 오래도록 쌓고 생각한 마음은 필시 버리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쉽게 코를 버리고 다음에 배꼽을 반연할 수 있습니까?
󰂼 본래부터 ‘얻으면 머물지 않으리라’ 期約을 하면, 생각이 이루어진 뒤엔 저절로 싫어하는 마음이 생긴다. 싫어하는 마음이 생기면 버리기는 대단히 쉽다.

󰃅 29 聖人의 가르침에 따르면, 처음으로 道에 들어온 자에게는 먼저 “다섯 가지 停心[五停心]”등을 가르치거늘, 지금은 어째서 그렇지 않습니까?
󰂼 五停心法과 코끝 등을 觀하는 法은 별개의 길이다. 내가 이어받은 것은 다만 이것에 의지한다.

󰃅 30 聖敎에는 “먼저 多聞을 배우지 않았으면 禪을 修練하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있는데, 들은 것이 적은 사람도 禪을 修練할 수 있습니까?
󰂼 우리 和尙과 아사리들께서 이어 내려 온 한 가지 길에서는 곧바로 禪을 배울 뿐, 들은 것이 많고 적음을 논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들은 것이 많다면 제일이긴 하나, 간혹 多聞이 거꾸로 浮散함만 더하기도 한다. 본래부터 定을 따르는 多聞과 따르지 않는 多聞이 있다.

󰃅 31 聞慧 ․ 思慧 ․ 修慧는 차례로 서로 생겨나게 하는 것입니다. “많이 들음”이라는 聞慧가 이미 없다면 修慧인 禪定이 어떻게 일어납니까?
󰂼 설사 어떤 사람이 한 글자도 알지 못한다 해도 다만 참선하는 법을 이해하기만 하면 이 또한 多聞이지 반드시 글을 폭넓게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주리반타는 쓰레받기를 외울 땐 빗자루를 잊어 버렸지만 大阿羅漢이 되었는데, 이것이 어찌 多聞(으로 인한 것)이랴? 우선은 이러한 증명이 되나 모든 것이 다 반드시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 32 사람들 중에는 持戒者도 있고 破戒者도 있는데, 그 두 부류 모두 禪을 배울 수 있습니까?
󰂼 持戒와 破戒를 막론하고 모두 禪을 배울 수 있다. 하지만 먼저 持戒가 淸淨한 것이 제일이다.

󰃅 33 聖敎에서 말씀하시길, 시라[戒]가 淸淨해야 三昧가 現前한다고 하셨는데, 어째서 破戒한 사람이 定을 닦을 수 있습니까?
󰂼 聲聞의 持戒는 보살의 破戒이다. 小乘에서는 重罪를 범하면 영원히 僧團에서 버려진다. 그러니 어찌 禪을 닦을 수 있겠는가? 시라가 淸淨하지 않으면 定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이 말씀에 근거한 것이다. 하지만 大乘에서는, 다만 마음을 쉴 수 있으면 참된 懺悔이다. 참된 懺悔인 까닭에 障碍가 소멸하고 戒가 생겨난다. 그러므로 禪定을 얻는 것이다. 하지만 먼저 方等懺悔에 들어가서 罪相을 없애고 다시 戒品을 닦고서야 비로소 禪을 익히는 경우도 있다.

󰃅 34 어떤 법을 닦아야 마음을 빨리 安定되게 할 수 있습니까?
󰂼 빨리 安定되길 바라는 것은 도리어 懈怠이니, 빠른 것을 바라지 말라. 다만 생각을 떠나고 모든 攀緣을 쉬어서 定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바라지 않는 것도 아니며, 定을 얻었건 얻지 못했건 근심하지 않는 것, 이것이 크게 精進하는 것이다.
우댜나國에 한 스님이 있었는데, 오래도록 坐禪하였지만 定을 얻을 수 없었다. 그래서 드디어 禪業을 그만두었더니, 갑자기 어떤 天人이 사람으로 변화하여 그 앞에 와서는 쇠망치를 갈았다. 스님이 무얼하려고 하느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바늘을 만들려 한다고 했다. 스님이 말하길 어찌 바늘을 만들 수 있겠는가? 하니, 天人이 대답하기를 “(精進을) 쉬지 않는다면 이루어진다.”고 하니 스님이 마침내 깨닫고는 다시 돌아와서 禪을 익혔고, 결국엔 道果를 얻었다. 그 뒤에 다시 滅盡定에 머물렀는데, 滅盡定에 머문 까닭에 오늘날에 이르도록 여전히 (죽지 않고) 존재한다. 그러므로 ‘생각을 떠나는 것’을 부지런함으로 삼기만 하면 定을 빨리 얻지 못할까 걱정할 게 뭐 있겠는가?

󰃅 35 定에 들었을 때는 어떤 모양이 있습니까?
󰂼 定의 모양은 지극히 많다. 우선 몇 가지 들자면, 머리가 대장부의 모습과 비슷하기도 하고, 몸 위에 많은 때나 더러운 기름이 느껴지기도 하는데, 이런 것들은 障碍가 있는 모양이다. 이때는 자세를 바꾸거나 쉬면된다. 혹은 몸 위에 벌레나 개미가 기어다니는 것 같기도 하고, 구름과 흰 무명같은 것들이 등에서 위로 올라가는 듯하더라도 괴상하게 여기거나 손으로 만지지 말라. 혹은 기름방울이 머리나 얼굴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 같기도 하거나, 앉은 자리가 환해지면, 이것들은 모두 定이 나타나기 전의 양상이다. 혹 오래 앉거나 서 있어서 몸에 피로와 권태가 있을 때, 곁에서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들리거나, 문을 두드리는 등의 소리가 있으면 즉시 곧장 定에서 나와 잠을 자거나 쉬도록 하라. 이는 天神들이 사람이 피로하고 권태로운 줄을 잘 알아서 와서 깨우치는 것이다. 몸이 가볍게 들리게 느껴지되 즐거우면 이는 神足이 나타나기 전의 양상이고, 몸이 가볍게 들리되 고통스럽다면 이는 (몸을 이루는 四大 중에서) 바람[風大]이 크게 늘어난 것이다. 몸이 뜨거운 곳에 있게 느껴지면 이는 火光定의 전조이다. 방 하나가 환해지면 이는 初禪의 전조이다. 세상에서 맡기 힘든 기묘한 향기가 맡아지면 이는 定이 성취된 모양이다. 이런 일은 모두 서술할 수 없다. 다만 이런 違順의 모양이 나타나면 그 모든 것에 대해 取着함으로써 근심이나 기쁨이 생기게 하지 말고 본래 반연하던 대상을 반연하여 그 마음을 安靜시켜야 한다.

󰃅 36 坐禪하는 이는 억지로 心身을 어길 필요가 없다고 하셨는데, 만약 위에서 말한 것 같은 벌레가 기어가는 등의 느낌이 있을 때 뜻을 억제하여 만지지 않는다면, 이것이 어찌 心身을 어기는 것이 아닙니까?
󰂼 아직 定을 얻지 못했을 땐 억지로 어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점차로 하여 이미 定에 들어 있으면 어겨도 잘못됨이 없다.

󰃅 37 定에서 나오려고 할 때는 어떻게 합니까?
󰂼 처음 定을 배우는 이는 먼저 몇 時라든가, 종이 울릴 때라든가,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定에서 나오겠다고 기간을 정한 뒤에 禪에 들어가면 반드시 그렇게 된다. 定에 들어간 사람 가운데는 몇 겁을 경과하는 사람도 있고 하루나 이틀 혹은 7일 동안 정에 드는 경우가 있는 데, 이 모두는 마음에 이렇게 기약한 것을 따라 길고 짧은 것일 뿐이다. 定에서 나오려고 하면, 먼저 마음으로부터 움직여라. 마음이 움직이고 나면 氣脈이 점차로 통하리니, 그런 뒤에 서서히 몸을 움직여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經에서 이르기를, “世尊께서 禪定에서 찬찬히 일어나셨다.”고 하니라.

󰃅 38 魔事가 있을 경우 어떻게 없앱니까?
󰂼 다만 4威儀 가운데 자세를 쉽게 바꾸면서 번갈아들며 닦을 줄 안다면 魔事가 없어지리라. 힘써 억지로 하여 스스로 고통이 생기게 하지 말라. 깨달음은 즐거움에서 생긴다. 外道들이 행하는 여러 가지 고통 받는 법과는 다르다. 이 消息을 안다면 魔事는 저절로 제거된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없애지 못할 경우엔 禪業을 버려두고 經論을 읽거나 사람들이 많은 시끌벅적한 곳에 들어가서 멋대로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마음을 놓아버리면 魔事가 반드시 없어질 것이다. 禪病이 생기면 마땅히 經敎에 의지해서 禪法으로 治癒해야지 침이나 藥 같은 것으로는 고칠 수 없다.

󰃅 39 坐禪할 때 魔事를 예방하는 방법이 있습니까?
󰂼 무릇 禪을 배우고자 하거든 먼저 悲願을 일으켜야 한다. ‘내 이제 삼매를 닦아서 반드시 보디를 취하여 群物을 널리 이롭게 하고자 하오니, 바라옵건대 三寶와 여러 天神들께서는 이 몸을 護衛하여 재앙과 장애가 없게 하여 지이이다.’ 매번 좌선할 때마다 이렇게 맹세한 후에 禪을 익혀라. 그에 더하여 禪堂안의 사방 벽 가장자리에 聖僧들의 형상을 많이 그리는데, 그 모양은 모두가 결가부좌하여 坐禪하고 있는 모양을 한다. 그 聖僧의 형상은 약간 크게 그려야 마땅하고 꽃과 향을 공양올린다. 그 근처 아랫쪽엔 여러 凡僧들의 형상을 그리는데 약간 작게 그린다. 그 크기는 사람 크기로 하고 역시 좌선하는 형상으로 그린다. 그런 뒤에 그 가운데서 禪을 익히면 魔事를 예방할 수 있다. 

󰃅 40 佛堂에서 坐禪해도 됩니까?
󰂼 坐禪은 고요한 방이나, 나무 아래나, 무덤 사이나, 한데[露地] 등에서 해야 마땅하다. 佛堂에 있으면서 할 필요는 없다.

󰃅 41 많은 사람이 동일한 장소에서 좌선해도 됩니까?
󰂼 된다. 이때 각자는 다른 사람의 등을 향하고 앉아야지 서로 마주 보고 앉아서는 안 된다. 사람이 많을 경우엔 밤에 한 개의 燈을 켜고, 숫자가 적을 경우 불을 켤 필요가 없다.

󰃅 42 坐禪할 때 반드시 가사를 착용해야 합니까?
󰂼 벌거벗고 있을 수는 없지 않는가?

󰃅 43 禪을 익히는 이는 一切時에 항상 생각을 거두어들여야 합니까?
󰂼 대소변을 눌 때를 제외하고 나머지 때엔 항상 마음을 거두어들여야 한다.

󰃅 44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을 止라고 하는데, 止 가운데 觀이 있습니까?
󰂼 단지 배워서 알려고 하지마라. 때가 이르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 45 坐禪하는 사람이 經을 지니고 講說하는 등의 일을 겸할 수 있습니까?
󰂼 감당할 힘이 있는 이라면 겸하여 닦아도 된다. 하지만 여러 가지 業중에서 禪業이 가장 뛰어나다. 그러므로 인도에서는 제일 좋은 房舍와 供養物은 禪師에게 우선적으로 供給하고, 經師와 律師에겐 중간 것이나 아랫것을 준다.

󰃅 46 참선을 한 사람은 목숨이 마칠 때 惡趣를 물리칠 수 있습니까?
󰂼 예를 들어, 지극히 험한 곳을 활과 화살을 지니지 않고 가다가 도적을 만나면 반드시 목숨이 위태로울 것이다. 몸도 이와 마찬가지로써 이미 無常이라는 극히 험한 곳에 처해 있으니 禪修練이라는 武器를 미리 준비해 놓지 않으면 臨終이란 도적을 만나면 반드시 마음이 어지러운 상태로 죽게 될 것이니 대부분 惡趣에 태어나게 된다. 하지만 (평소에) 마음을 安定시켜(마음을 가라앉히고) 편안하게 되면 죽는 순간에도 마음이 어수선해지는 일이 없고, 마음이 어수선하지 않으면 원하는 대로 좋은 곳에 태어난다. 살아 있는 중에도 오히려 果證을 기약할 수 있거늘 어찌 죽을 때 惡趣를 물리칠 수 없겠는가? 설사 평생 禪을 修習했지만 定을 얻지 못하다가 죽을 무렵에 비로소 얻는 자도 있는 데, 그런 사람은 죽은 뒤에 顔色이 변하지 않고 身體가 부드러우니 이것이 그 특징이다.

禪師께서 자주 말씀하시기를, “많이 듣고 思惟하는 것으로써 배우는 것은 흡사 좋은 處方을 익히는 것과 같다. 지혜를 닦아야만 비로소 영험 있는 藥[妙藥]을 먹는 것과 같다. 비록 많이 알고 보시를 행하고 戒를 지켜도, 마음을 安靜시켜 定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는 修行者라는 이름을 얻을 수 없다.”라고 하시고, 또 말씀하시길, “禪定이란, 저속한 것을 닦아 훌륭하게 만들고 精神을 훈련하는 것이니, 흥미를 느끼는 무리들은 특히 마땅히 (禪定을 익히는) 습관을 들일지니라.”라고 하셨다. 다만 갑자기 잠시 玄匠(조예가 깊은 사람)을 만나 앞에서와 같이 간략히 질문했고, 시간에 쫓겨 서두르느라 자세하게 두루 갖추지는 못했으니, 더 상세한 내용은 經典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承保 3년(西紀 1076년) 6월 22일 光明寺에서 베끼기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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