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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법정스님의 길상사 법회 마지막(길상사회주 그만두던 날) 법문
이름 숨결 날짜 2003-12-28 [03:47] 조회 6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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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_12_24.asf/받음:1103

 


2003.12.21 법정스님 정기법회 법문
작성 날짜: 2003/12/25
작성자 : 박용

길상사가 개원 된지 6 주년이 된답니다. 처음 이 절을 세울 때, 저가 가나한 절을 표방했습니다. 물론 주어진 가난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선택한 맑은 가난, 청빈한 절이 되었으면 싶다고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온 세상이 과잉 소비와 포식으로 인해서 생태계가 말할 수 없이 훼손되고 있습니다. 또, 사람이 병들어가고 있습니다. 주어진 가난은 우리가 극복해야할 과제이지만 스스로 선택한 맑은 가난은 우리 조상들이 가르쳐준 아름다운 미덕입니다. 누구나 똑같이 부자가 되기는 불가능합니다. 이 지구상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부자로 산다면 이 지구 하나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요. 지구가 몇 개 더 있어야 된답니다. 그렇다면, 다 부자로 살 수 없다면 가난은 이웃과 함께 나누면서 더불어 살 일 밖에 없습니다. 미래학자들과 생태학자들이 다 같이 이야기합니다. 앞으로 지구가 존속되려면 지금 식, 즉 미국식을 흉내내서는 안되겠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억제하면서 자제하면 덜 부자로 맑은 가난으로 사는 일밖에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중생이 앓기 때문에 나도 앓는다" 이건 불교 [유마경]에 나오는 교훈입니다. 이웃이 앓기에 나도 앓는다. 함께 나누는 윤리입니다. 이런 윤리 없이는 세상이 존속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맑은 가난을 표방한 '길상사'라면 앞으로 어떤 스님들이 살든 간에 도량에서 그런 정신이 길이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최근에 들어서 큰스님 작은 스님 할 것 없이 스님들이 많이 돌아가시고 있습니다. 청학스님 이야길 들으니까 한 달 새 여섯 분이 돌아가셨대요. 일설에는 금년에 열 분이 돌아가실 예정이래요. 아직 T.O가 남아있기 때문에 채우려면 몇 분이 더 돌아가셔야 될 것입니다.

우리 이웃의 죽음은 남은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줍니다. 우리 둘레에서 누가 살다가 돌아가시고 나면 유가족뿐만 아니라 이웃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줍니다. 저도 스님들 죽음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많이 해보았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선가에서는 죽음에 이르러 마지막 한마디를 남기는 일이 마치 무슨 의례처럼 행해지고 있어요. 이를 임종계 또는 유계라고 합니다. 열반송이라는 말은 한국에서 요즘 쓰고 있지 일찍이 쓰지 않던 말입니다. 불교역사 어디를 보아도 열반송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임종계 혹은 유계라고 합니다.

임종계는 대개 짧은 글 속에 살아온 해 수와 거리낌없는 심경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죽음에 이르러서 가까운 제자들에게 직접 전하는 생애에 마지막 한마디이지요. 따라서 죽기 전에 시를 짓듯이 미리 써놓은 것은 유서일 수는 있어도 엄밀한 의미에서 임종계는 아닙니다. 타인의 죽음을 모방할 수 없듯이 마지막 남기는 그 한마디도 남의 것을 흉내낼 수 없습니다. 그의 살아온 자취가 그를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그의 죽음까지도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가장 그 자신다운 한마디라야 합니다.

'남악 현태'라는 스님이 있습니다. 9세기 당나라 때 스님인데 '석상 경재' 스님의 제자입니다. 이분이 예순 다섯 살 때 입적해요. 외떨어진 암자에서 혼자 살기 때문에 ,전혀 제자를 두지 않고, 맑게 사신 분입니다. 가끔 지나가는 스님들이 그를 찾을 뿐 세상과는 교섭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죽기 바로 전 날이지요. 곁에 아무도 없자 산 아래에 내려가서 지나가는 한 스님을 불러다가 화장을 당부합니다. 나무를 암자 앞에 쌓아두고 가사를 입고 그 위에 앉아 입적합니다. 그런데 이분이 남긴 임종계가 있어요. 화장을 도운 객 스님이 전해 내려온 겁니다. [전등록]이라든가 [조당집]에 이분의 행적이 ,소상하게 나오지는 않지만, 간략하게 나오면서 임종계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내 나이 올해 예순 다섯, 사대(지,수,화,풍)가 주인을 떠나려 한다. 도는 스스로 아득하고 아득해서 그곳에는 부처도 없고 조사도 없다. 머리 깎을 필요도 없고 목욕을 할 필요도 없다. 한 무더기 타오르는 불덩이로 천 가지 만 가지가 넉넉하다" 이제 곧 불로 태워버릴텐데, 한 무더기 타오르는 불꽃에 모든 것이 불로 타버릴텐데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는데 무엇 때문에 굳이 목욕하고 삭발하겠느냐 이런 뜻이지요 요즘 선사들이 임종하는 것처럼,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야단스러운 소리도 아니고 자기 심경 그대로 평범한 말로써 표현하고 있습니다.

'육조' 스님의 제자로서 남양의 '해충국사'라고 큰스님이 있습니다. 이 분이 죽으려고 할 때 마지막 유언을 듣고 싶어하는 제자들을 꾸짖으며 "내가 지금까지 너희들에게 말해온 것이 모두 내 유언이다" 이렇게 말했어요. 따로 구질스럽게 유언 같은 것이 필요 없다는 것이지요. 또 어떤 스님은 제자들이 임종계를 청하자 "임종계가 없으면 죽지도 못한단 말이냐?" 이렇게 항의해요. 지금까지 내가 해온 말이 임종계라고 말합니다. 이런 법문을 들을 때 죽을 때 무슨 말을 남기느냐 이건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살았느냐 순간순간 한 생애를 어떻게 살아왔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이지 죽을 때 그 야단스럽게 한 것은 썩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 또 임종계 없이 돌아가신 큰스님들이 훨씬 더 많아요. 구질스럽게 무슨 임종계니, 유계니, 유언이니 남기지 않고 자취 없이 바람처럼 사라진 그런 큰스님들이 불교역사에 훨씬 많습니다.

일반인들은 그렇지 않은데 스님들이 죽으면 화장하고 사리라는 것이 나왔다고 요란 떨지 않습니까. 사리는 원래 범어(산스크리트)에서 온 말인데 타고남은 유골을 말합니다. 송광사에서 저가 직접 들었는데, 태국에서 온 스님이 어떤 노스님이 돌아가시고 사리는 어떻게 합니까 이렇게 물어요, 타고남은 유골이에요. 사리라는 게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불자들이 화장하는 것은 죽고 나서 아무 것도 남기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본래 한 물건도 없고(본래무일물)를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소식이에요. 바로 그것이 가풍입니다. 죽어서 사리를 많이 남기면 큰스님이고 그렇지 않으면 큰스님이 못되고 이건 아닙니다.

13세기 송나라 때 '조은' 스님이라고 하는 분이 있어요. 이 분은 이런 임종계를 남겼습니다. "부처니 중생이니 모두 다 헛것. 찾는다면 눈에 든 티끌. 내 사리 천지를 뒤덮으니 식은 재를 아예 뒤적이지 말라" 이게 마지막 말이에요. 그런데 사리 줍는데 한번 보십시오. 타고난 유골을 돌에 갈고 이걸 채에 걸러고 그기서 또 무엇을 골라내고, 마치 사금을 캐듯이, 이게 얼마나 불경스러운 일이에요. 돌아가신 스님을 타고 남았으면 그대로 처리해야 되는데, 그것을 덜덜 갈아서 채에다 걸러서 사리니, 냉면이니 가려내지 않나요. 이건 말도 안 되는 얼마나 불경스러운 일이에요. 그래서 건져낸 사리가 무엇이 그렇게 대단한 것이에요.

그러면 부처님의 진신사리는 어디에 있는가? 부처님의 육신에서 나온 사리 그건 망치로 때리면 깨지는 것이에요. 대단한 것이 아니에요. 부처님의 진신사리, 법신사리는 어디에 있는가? 45년 동안 중생을 교화하면서 가르친 바로 그것이지요. 대장경으로 전해진 바로 그것입니다. 그 법문입니다. 그런 가르침이 없었다면 불교가 오늘까지 존속될 수 없습니다. 진짜 사리는 그 분의 가르침이에요.

고려말 '백운' 스님이라고 큰스님이 계셨어요. ,어록도 있고, '백운' 스님은 이렇게 읊었습니다. "사람이 칠십을 사는 일 예로부터 드문 일인데 일흔 일곱이나 살다가 이제 떠난다. 내 갈길 툭 틔었거니 어딘들 고향 아니랴" 대략 임종계를 보면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이런 표현들이 많이 나옵니다. "무엇 하러 상여를 만드는가, 이대로 홀가분히 떠나는데" 스님이 죽으면 상여를 요란하게 만들어 국화 꽃송이를 5만 개 7만 개 이렇게 장식하지요. 곧 태워버릴텐데, "내 몸 본래 없었고 마음 또한 머문 곳 없으니 태워서 흩어버리고 시주의 땅을 차지하지 말라"는 간절한 유언입니다. 살아서 늘 시주의 은혜 속에 살았는데 또 무슨 뼈에서 나왔다고 부도니 탑이니 또 시주의 은혜를 짓는단 말입니까. 시주의 은혜를 짓지 말라는 것이에요.

불자들이 잘 아는 '조주' 스님은 백 스무 살 살다가 돌아가신 선지식 아닙니까. '조주' 스님이 세상을 떠나려고 할 때 제자들에게 이렇게 당부합니다. "내가 세상 떠고 나면 불태워서 사리 같은 걸 골라 거두지 말라. 선사의 제자는 세속인과 다르다. 이 몸은 헛것인데 사리가 무슨 소용이냐. 이런 짓은 당치 않다." 이렇게 준엄하게 당부합니다.

지금까지는 남의 이야기입니다. 만약 여기 모인 우리 자신이 내일 죽게 된다면 마지막으로 무슨 말을 남기겠습니까? 각자 한번 정리해보세요.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당장 내일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그때가 옵니다. 저마다 섣달 그믐날이 와요. 그때를 가끔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있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에요. 이런 기적 같은 삶을 헛되이 보낸다면 후회할 때가 반드시 옵니다. 죽음을 어둡고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삶의 한 모습이에요. 삶의 과정입니다. 죽음이 없다면 삶은 무의미해져요. 죽음이 받쳐주고 있기 때문에 삶이 빛날 수 있습니다. 만약 사람이 이 백년 삼 백년 산다고 가정한다면 얼마나 끔찍해요. 살만큼 살았으면 교체해야 해요. 언젠가 올 그날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건 남의 일이 아닙니다. 내 자신의 일이에요. 이 일만은 절대로 어김이 없습니다.

죽음이 싫으면 살 줄 알아야 해요. 죽음을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사는 즐거움을 누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삶의 어떤 목적이 있어야 해요. 무엇 때문에 내가 사는지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살아갈 이유를 갖고 있는 사람은 어떤 어려운 환경에서도 살아남습니다.

오래 전 들은 이야기를 소개해 드리지요. 한 어머니는 큰 수술을 여덟 번이나 받고 마치 몸이 굴 속 같데요. 자궁암을 비롯해서 위암, 장암 등 암이 전이되면서 그때마다 위험한 큰 수술을 되풀이하게 됩니다. 이런 수술을 받고도 그 어머니가 어떻게 살아있는지 의사들 자신도 아주 놀라워하면서 신기해해요. 삶은 기적 같은 일입니다. 그 어머니가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은 집에 정신박약아 아들이 하나 있기 때문입니다. 항상 누워서만 지내기 때문에 대소변까지 받아내야 합니다. 나이가 스무 살인데도 서너 살 짜리 유아 정도의 지능밖에 없어요. 말도 한 세 살 먹은 아이 정도 밖에 못합니다. 아이가 부실하게 태어난 후 얼마 안되어서 남편과 이혼을 합니다. 의사들 말로는 아이는 3년을 넘기지 못 할거라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생명의 신비를 현대의학은 모릅니다.

그 어머니가 밖에서 일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아들이 이불 속에서 어머니를 보고 웃음 가득 띠면서 좋아서 어쩔 줄 모른 데요. 종일 혼자 누워 있다가 ,단 두 식구, 엄마가 밖에서 돌아오니까 그렇게 좋아 반겨서 어쩔 줄 몰라 한데요. 이런 아들을 대할 때마다 어머니는 하루 일에 피로를 잊고 어떻게 해서든지 이 아이를 위해서 내가 살아야 한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큰 수술을 여덟 번이나 받았으니 오죽 하겠습니까. 날씨가 궂거나 무거운 것을 들면 수술자리가 아파서 견딜 수가 없답니다. 차라리 죽었으면 하고 자살도 몇 번이나 결심하게 됩니다. 그러다가도 이 아이를 혼자 남겨두고 내가 죽을 수는 없다. 내가 살지 않으면 저 아이 혼자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다. 이 한 생각으로 자신이 고통받는 것은 생각할 여유조차 없습니다. 이것이 그 어머니가 여덟 번이나 수술을 받고 살아갈 수 있는 비결입니다.

집안에 정박아가 있어서 어머니만 기다리고 어머니만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 아이를 돕고 이 아이를 보살피지 않으면 안되겠구나 이런 염원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의사들이 3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아이가 스무 번째 생일을 맞이하던 날 그 어머니는 아들이 좋아하는 팥을 넣은 찹쌀밥을 지어서 생일을 축하해줍니다. 이날 아들은 어머니를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엄마, 고마워요" 이렇게 말하더래요. 아들은 생일을 축하해주어서 고맙다고 말하는 것이겠지만 어머니로써는 여태껏 스무 살 성년이 되도록 키워주어서 정말 고맙다는 말로 들렸다는 것입니다. 정박아의 자식을 연민의 정으로 보살피는 어머니의 지극한 정성이 어머니 자신 죽을 고비를 몇 번이고 무사히 넘기게 된 것입니다.

단 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인생은 살아가는 가치가 있습니다. 불구자인, 정박아인 단 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인생은 살아갈 가치가 충분히 있습니다. 어쩌면 그 어머니를 병고로부터 살려내기 위해서 보살이 그 집에 정박아로 태어난지도 알 수 없습니다. 세상일은 알 수 없습니다. 의미로 보면 충분히 그렇습니다. 살아갈 이유를 충분히 갖고 있는 사람은 어떤 어려운 환경에서도 살아남습니다. 병든 자식을 위해서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간절한 소망과 염원이 어머니 자신을 구하고 아들을 구한 것입니다.

합장하고 저를 따라 외우세요.

중생이 끝없지만 기어이 건지리라.
중생이 끝없지만 기어이 건지리라.
중생이 끝없지만 기어이 건지리라.



법문 동영상,녹취록 출처 : 길상사 http://www.kilsangsa.or.kr


만다라  법정스님!!..건강하소서...공감,공감 ....동감이요. 10/30 20:41  댓글 고치기  댓글 지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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